no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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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notes

그해 여름은 매우 더웠다. 아무도 이곳까지 와서 우리를 찾아낼 사람은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오후가 되면 우리는 매립지로 나아가 사람들이 가장 빽빽하게 들끓는 바닷가 모래밭을 찾아내곤 했다. 그러나 우리는 해수욕 타월을 펴고 누울 수 있는 아주 조그만 공간을 찾아 모래밭으로 내려갔다. 태양의 향기에 젖은 사람들 속에 파묻혀 사는 그 순간만큼 우리가 행복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우리들 주위에서는 어린아이들이 모래성을 쌓고 있었고 바닷가를 돌아다니는 장사꾼들이 누워 있는 몸뚱이들을 타넘고 다니며 아이스크림을 팔았다. 우리는 그곳의 다른 모든 사람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그 팔월의 일요일들에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분간하게 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파트릭 모디아노, <팔월의 일요일들>, p.165.





Maurice Blanch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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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notes

또 다른 밤이 다가옴을 예감하는 자, 그는 자기 자신이 밤의 심장부에 다가가고 있음을, 그가 추구하고 있는 이 본질적인 밤의 심장부에 다가가고 있음을 예감하는 자이다. 어쩌면 바로 ‘이 순간’에 그는 비본질적인 것에 몸을 내맡기게 되고, 모든 가능성을 잃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사막이 신기루의 유혹이 되는 바로 그 지점을 피해 가라는 충고가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것처럼 그는 바로 이 순간을 피해야 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러한 신중성은 여기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우리가 밤에서 또 다른 밤으로 이동해가는 정확한 순간은 없다. 또한 걸음을 멈추고 뒤로 되돌아와야 할 경계선도 없다. 자정이 결코 자정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주사위들이 던져졌을 때, 그때가 자정이다. 우리는 그 주사위들을 자정에밖에는 던질 수 없다.

-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제5장 ‘영감’, I. 밤, 바깥 中.




그러나 밤 속에 또 다른 밤은 우리가 그것과 하나가 될 수 없는 무엇이다. 그것은 끝나지 않은 반복이며, 아무것도 지닌 것 없는 포만이며, 근거도 깊이도 없는 것의 반짝임이다. 또 다른 밤의 덫, 그것은 우리가 틈입할 수 있는 최초의 밤이다. 그리고 틀림없이 고뇌로써 돌입하는, 그러나 고뇌가 당신을 감추어주고, 불안정성이 피난처가 되는 최초의 밤이다. 최초의 밤 속에서는 앞으로 전진하면 밤의 진실을 찾아낼 것만 같고, 좀 더 앞으로 나가면 무언가 본질적인 것을 향해 가게 될 것만 같다.

-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제5장 ‘영감’, I. 밤, 바깥 中.




한 어린 소녀가 황혼녘에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해변에서 돌아온다. 그 아이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더 계속하여 놀고만 싶었기 때문에 울고 있다. 그 소녀는 멀어져 간다. 그녀는 벌써 길모퉁이를 돌아갔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 또한 그 어린아이의 슬픔과 마찬가지로 저녁 속으로 빨리 지워져 가버리는 것은 아닐까?

- 파트릭 모디아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p.251, 마지막.




여하튼간에 내 배고픔을 가장 광범위한 의미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해두자. 음식에 대한 배고픔일 뿐이었다면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게 있을까? 음식에만 배고픈 게? 보다 광범위한 배고픔의 징표가 아닌, 단순한 밥통의 배고픔이라는 게 있을까? 배고픔, 나는 이것을 존재 전체의 끔찍한 결핍, 옥죄는 공허함이라 생각한다. 유토피아적 충만함에 대한 갈망이라기보다는 그저 단순한 현실, 아무것도 없는데 뭔가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소망하는, 그런 현실에 대한 갈망이라고 말이다.
…… 배고픔, 이건 욕망이다. 이것은 열망보다 더 광범위한 열망이다. 이것은 힘으로 표현되는 의지가 아니다. 그렇다고 유약함도 아니다. 배고픔은 수동적인 게 아니기 때문이다. 굶주린 사람, 그는 무언가를 찾는 사람이다. …… 이것은 지독한 열망이다.

- 아멜리 노통브, <배고픔의 자서전>, p.20.




내게 있어, 현재는 영원이고, 영원은 무상하게 그 모습을 바꾸며, 처연히 흘러가다가는 형체 없이 녹아내린다. 찰나의 순간은 삶 그 자체. 순간이 사라지면 삶도 죽는다. 그러나 매 순간 인생을 새로 시작할 수는 없으니, 기왕 죽어버린 시간들로 판단하는 수밖에 없다. 이건 마치 물에 밀려 흘러가는 모래와 같다……. 헤어날 가망이라곤 처음부터 아예 없었다. 소설 한 편, 그림 한 점이 어느 정도 과거의 감회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으론 충분치가 못하다. 아니 턱없이 모자란다. 실존하는 것은 현재뿐인데, 벌써부터 나는 수백 년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숨이 막힌다. 백 년 전에도 어느 여자아이가 지금 나처럼 살아 있었겠지. 그러다 죽어갔으리라. 지금은 내가 현재다. 하지만 나는, 시간이 흐르면 나 또한 사라지리라는 것을 안다. 절정에 이르는 찰나, 태어나자마자 사라지는 찬란한 섬광, 쉼없이 물에 밀려 흘러가는 모래. 그렇지만 나는 죽고 싶지가 않은걸.

-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pp.30-31.




그래서, 미칠 수도 미치지 않을 수도 없는 이유는 자기로부터 자기를 불러내는 자가 있어서다. 끊임없이 자기로부터 떠나서 자기를 응시하는, 그가 있어서이다. 끊임없는 자아의 소급 또는 환원. 미칠 수도 미치지 않을 수도 없는, 결핍의 경계만을 한없이 따라가는 자는, 그래서 슬프다. 어딘가에 그가 있어, 나는 미쳐지지 않는 것이냐?

- 이인성,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 p.227.




선택이란 원래 실존적인 것이므로,
실존이란 원래 상황을 전제로 하므로,
상황이란 원래 한계의 설정이므로,
한계란 원래 결핍의 확인이므로,
결핍이란 원래 욕망의 배면이므로…
그런데 욕망이란 원래 선택을 거부하므로…
선택의 거부는 광기만의 권리이므로…
선택할 수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없는,
미칠 수도 미치지 않을 수도 없는 자는
결핍의 경계만을 한없이 따라가므로…

- 이인성,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 p.105.